새벽 5시, 이동 준비 시작
새벽 5시. 알람이 울리자 창밖으로는 트빌리시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깜박였다.
전날 늦은 밤 미리 예행 연습을 해둔 덕분에 동선은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7시 정각에 체크아웃을 마치고 캐리어를 끌고 Square Station 지하철역(Line 1)으로 향했다.
트빌리시 지하철은 두 개의 노선(Line 1·Line 2)으로 구성된 도시의 핵심 대중교통망으로,
버스와 연계해 시내 전역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메트로머니(Metromoney) 카드로 결제하며 요금은 저렴(₾1)하고,
90분내 시내 버스 등 다른 교통수단으로 환승 가능하다.
1개의 교통카드로 다수가 이용할 경우 환승은 1인만 인식하는 것 같다.
배차 간격도 짧아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 실용적으로 이용한다.
환승 역은 Station Square 역이다.

구소련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깊고 급경사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긴 터널 끝에서 묵직한 진동과 함께 전동차가 들어왔다.


우측 플랫폼에서 1호선을 타고 3정거장 이동 후 Didube(디두베) 역에 도착.
역을 나와 역 위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좌측 계단으로 내려가서,
굴다리를 통과, 노점상을 지나자 좌측에 주차장이 펼쳐졌다.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에 차(미니 버스, 밴, 택시 등)를 세워두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애써 호객행위를 피해 흥정 없이 우선 길을 건넜다.

도로 건너 편 과일 노점상 골목을 통과하니,
카즈베기 등으로 출발하는 마르슈루트카(Marshrutka, 공유버스)들이
디두베 버스 정류장에 가득 주정차해 있었다.

아침 빵과 흥정의 거리
버스 정류정 입구 베이커리(여럿 있다)에 들러 갓 구워낸 조지아식 빵
쇼티(Shotis Puri)를 하나 사서 따끈한 김이 오르는 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베이커리 앞에 있으니 버스 정류장에서 나온 Marshrutka 기사가 흥정을 해왔다.
“카즈베기? Marshrutka! 20 라리(승객 15 라리, 짐 5 라리)! 1 stop, 08:00 출발!”
3 stops(아나누리 요새 Ananuri Fortress, 댐·저수지 Zhinvali Reservoir,
조지아-러시아 우정 기념비 Georgia–Russia Friendship Monument)을 요구하니 안된다고 했다.

그러던 중 지하철 역 앞 주차장에서 부터 호객행위를 했던 기사분(공유 택시/봉고)이 다시 다가와
“3명 대기 중이고, 2명 추가시 출발. 2곳 정차에 40라리”를 제안.
08:00에 Marshrutka를 타고 가도 되므로 아쉬울 것이 없어,
흥정 끝에 3곳 정차, 각 stop 마다 20분 체류, 1인 35라리로 합의했다.
20라리 일반 교통(Marshrutka) 요금에 1곳 정차마다 5 라리씩인 더 지불하는 셈이었다.
그 기사분은 먼저 호객해 대기중인 미국인 여행객 3명에겐 가격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기사분은 “곧 출발”이라며 우리의 캐리어를 끌고가며 웃었다.
하지만 빈자리가 3자리가 더 있어 곧 출발이라는 약속과는 달리 호객행위는 계속됐다.
하지만 이른 아침에 운이 없었던지 여행객이 쉽게 채워지지 않아 30여 분 후.
햇살이 구름을 뚫고 나오자, 빈자리 채우는 것을 포기했다.
크락션과 엔진 소리를 울리며 늦은 출발에 시간을 단축하려는 듯한 기세로 힘차게 출발했다.
기사분은 안됐지만 우리들은 빈 자리 덕분에 넉넉하게 자리 잡고 이동할 수 있었다.
캅카스의 스위스를 향해
진발리 호수(Zhinvali Reservoir)
도시를 벗어나자 도로는 점점 푸른 산맥으로 이어졌다.
창밖에는 강줄기가 따라 흐르고, 멀리 설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곳이 왜 ‘캅카스의 스위스(Caucasian Switzerland)’라 불리는지, 단숨에 이해됐다.
첫 번째 뷰포인트인 진발리 호수(Zhinvali Reservoir)였다.

물빛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해서 대부분의 차량이 잠시 멈춰 사진을 남긴다.
멀리 둘러싼 산맥에 흰 눈이 내려 호수와 대비되는 하얀 풍경이 한층 더 또렷했다.

아나누리 요새(Ananuri Fortress)
이어지는 아나누리 요새(Ananuri Fortress)는
16세기 조지아 왕국의 흔적(성벽과 교회)을 간직한 채 고요히 서 있었다.
성벽 위로 올라서면 진발리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파란 호수와 돌벽이 겹쳐지는 풍경이 인상적이라 짧은 정차만으로도 방문 가치가 충분하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성벽 위에서 호수와 성곽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시원한 조망을 얻을 수 있다.

구다우리 전망대(Gudauri Viewpoint)
그 다음은 구불구불한 산길 끝의 구다우리 전망대(Gudauri Viewpoint, 2,380m).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로 가는 구절양장의 험악한 고갯 길을 오르면 해발 약 2,300m 지점의
반원형 파노라마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 조지아와 러시아의 우정의 기념탑(Georgia–Russia Friendship Monument, 1983)에
잠시 정차해 20여 분간 포토타임을 가졌다.

주변을 둘러싼 산맥이 그대로 발 아래로 꺾여 떨어지며 계곡이 깊게 패여 있어,
내려다보는 순간 고도가 몸으로 느껴진다.
도로 옆에서 몇 걸음만 옮겨도 끝없는 능선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바람 소리만 남은 고요 속에서 산 전체가 그대로 벽처럼 둘러선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발 아래로 굽이치는 계곡과 능선 뷰가 압도적이라 대부분 여행자가 가장 오래 머무는 포인트다.
탑을 등지고 서면 끝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파노라마로 펼쳐져 사진 촬영에 최적이다.

드디어 카즈베기(Kazbegi) 도착
구다우리 고개를 넘어 약 4시간 만에 Stepantsminda(카즈베기 마을)에 도착했다.
차량은 마을 중심부 광장에서 멈췄다.
눈앞에는 설산이 펼쳐지고, 고도가 있어 공기는 서늘하지만 맑았다.
조지아 일정중 날씨를 고려한 키즈베기 선택은 잘한 일이었다.
전날 뒤늦게 확정한 숙소(Rustaveli ST11)를 찾아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중심에서 두번째 이면 도로상의 모서리에 있는 숙소 외관을 보고는 잠시 실망했다.
숙소 리뷰를 봤을 때 한국인 평가가 전혀 없는 점이 의심스러웠으나
외국인 평가가 워낙 좋아 고심 끝에 선택한 숙소였다.

멀리서 보면 대충 지은 2층짜리 단독주택 같아 우리 시골 허청 같은 허름한 건물로 느껴졌다.
그런데 2층 발코니에서 주인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웰컴, 웰컴!” 하고 손짓해 들어오라고 반겼다.
사립문을 열고 앞마당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2층 발코니부터 거실, 방과 화장실까지 모두 깨끗하게 고급 자재로 리모델링돼 있었고,
발코니에서는 카즈베기 산(Mt. Kazbek)과 게르게티 교회(Gergeti Trinity Church)가 정면으로 한눈에 들어왔다.
방에서는 창틀 너머로 눈 덮인 뒷산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발코니에서의 점심, 신선놀음
배가 출출해 숙소 발코니에서 컵라면, 커피, 와인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높은 고도 덕분인지 공기가 달콤했고,
햇빛은 따뜻하게 발코니를 감쌌다.
눈앞에 코카서스 산맥의 병풍 설산, 그 아래 산림 지대의 붉게 물든 가을 단풍.
이보다 완벽한 점심 풍경이 있을까 싶었다.

게르게티 교회(Trinity Church)
오후 3시경, 두터운 옷을 챙겨입고 마을 센터로 내려가
게르게티 교회를 다녀오는 것을 현지 택시 아저씨와 흥정했다.
구름이 지나가고 있어 게르게티 교회에 오르면 카즈베기산의 정상이 보일터였다.
처음 아저씨가 제시한 금액은 50 라리,
결국 40 라리에 40분 정상 체류 조건으로 협상 완료.
경사가 심한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정상에 도착하니
해발 2,170m의 게르게티 교회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게르게티 교회로 가기 전에 뷰포인트에 올라 섰을 때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병풍 설산과 울긋불긋한 계곡 풍경이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카즈베기산(Mt. Kazbek, 5,047m)이 살짝 구름에 가린 채 설산의 위용을 드러냈고,
산 아래 마을의 집들은 점처럼 작아 보였다.
사진을 찍고,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서 있었다.
반면, 맞은 편 산은 6부 능선까지 눈 꽃이 피어 선명한 하늘 아래 사진 배경으로 그만이었다.

카즈베기 산은 40분 동안 끝내 온전하게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구름 너머에서 보일 듯 말 듯 실루엣만 흘려보냈다.
마치 신에게 선택된 순간에만 베일을 걷는 신성한 산처럼,
전설과 신화의 잔향만 남긴 채 끝내 신비를 보존한 채로 사라졌다.
눈앞의 풍경이 아니라, 끝까지 잡히지 않는 그 감촉 자체가 오래 기억되는 산이었다.


게르게티 성삼위일체 교회는 14세기 조지아 정교회의 건축물로,
외침과 전란 속에서 신앙과 국가 정체성을 지키는 상징적 성소로 여겨졌다.
특히 왕가의 성물과 보물을 전란 시 이곳으로 옮겨 숨겼다는 기록이 있어,
“신앙의 요새”이자 “민족의 금고” 역할을 했던 장소로 의미를 가진다.


약속 시간, 약속 장소에 돌아오면서 뷰포인트에 잠시 멈춰달라고 요청했더니
기사 아저씨는 “10분 더 구경해도 좋아요!”라며 웃었다.
그 인심에 감사하며 게르게티 교회 초입 뷰포인트에서 여유를 즐겼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어서 올라온 대만인과 택시를 셰어해서 마을로 내려왔다.
오늘 카즈베기 정상을 온전히 보지 못했다고 내일 다시 올라올 순 없는 노릇이다.
내일은 또 주타 트레킹을 다녀와야 하는 일정이기 때문이다.
황혼의 휴식
마을로 내려와 SPAR 마트에 들러
우유, 과일, 샐러드, 간식을 구입했다.
또 마을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에 들러 세가지 빵(쇼티, 로비아니, 하차푸리)을 골고루 샀다.
갓 구웠을 때 제맛이 나고, 식으면 뭣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고 있었다.
룸스 호텔 커피숍에 가는 대신 발코니에 앉아 사온 음식 먹으며
어제 바투미부터 움직였던 터라 쉬면서 지금까지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어제까지 비바람이 몰아쳤던 조지아 전역이
오늘부터 맑은 날씨가 시작됐고, 내일은 더 완벽한 날씨를 예보한 상태였다.
수없이 날씨 앱에서 기상 예보를 확인하고 일정을 조정한 끝에
결국 ‘딱 맞는 날’에 2박을 잡은 셈이다.
취소와 재예약을 거듭할 때마다
조지아 숙소 주인들은 사정을 듣고는 흔쾌히 무료 취소를 수용해주었다.
그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다.